
드넓게 펼쳐진 에메랄드 빛 바다와 빽빽이 밀집해 있는 하얀 벽과 푸른 문, 주황색 지붕들. 이 풍경은 내가 컴퓨터를 처음 사고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놓은 풍경이었다. 어딘가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경은 나를 사로잡고도 남았다. 그러다 영화 '아바타'가 나왔고 그 때서야 그 곳이 발칸반도의 크로아티아라는 곳이고 영화 ‘아바타’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 그 때 부터다. 나는 그 곳을 가보고 싶었다. 어딘지 모를 때는 그냥 동경으로 남았었지만 어딘가 알고 나서는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그 곳에서 풍경으로 서 있고 싶었다. 그러는 참에 나영석 피디가 ‘꽃보다 누나’들과 허당 짐꾼 이승기를 대동하고 발칸반도에 있는 작은 나라 크로아티아에 갔다. TV에 비치는 영상들은 나를 더욱 더 크로아티아로 끌어 당겼고 드디어 이제 그 곳으로 떠나기 위해 저녁 내내 짐을 쌌다.가방을 싸는 햇수가 늘어 날 수록 상대적으로 가방이 가벼워 지는 건 여행지에서 버리는 것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마음 같아서야 여행은 혼자 떠나고 싶다. 여행이란 말 그대로 잠시의 일탈(逸脫)이다. 살던 곳에서, 하던 일에서 손 탁탁 털고 그렇게 떠나고 싶었다. 살다보니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방향을 잃었다. 혼자 여행하며 그 동안 해보지 못한 게으름을 맘껏 부려도 좋고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낯선 도시에서 할 일 없이 걸어도 좋다. 평소엔 하지 않았던 일을 하고 싶다. 그러자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집을 떠나는 일이다. 하지만 늘 저녁엔 짐을 싸고, 아침엔 덜퍼덕 주저앉아 짐을 푸는 일의 연속이었다. 혼자 만의 여행이라는 지침서를 쓴 미국 출신의 ‘폴 서루’가 쓴 글이 있다. ‘ 당신만의 여행을 위하여’ 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 했다.
‘하나, 집을 떠나라.
둘, 혼자 가라.
셋, 가볍게 여행하라.
넷, 지도를 가져가라.
다섯, 육로로 가라.
여섯, 국경을 걸어서 넘어라.
일곱, 일기를 써라.
여덟, 지금 있는 곳과 아무 관계가 없는 소설을 읽
어라.
아홉, 굳이 휴대전화를 가져가야 한다면 되도록
사용하지 마라.
열, 친구를 사귀어라.’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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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야기 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 그래서 동창모임에 나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들 하하거리고 웃는다. 그 속내야 뻔하다. 실천 불가능이라는 것이겠지. 그리곤 말 할 것이다. 마우스 몇 번이면, 가 보고 싶은 곳 다 갈 볼 텐데 굳이 그렇게 힘들게 다닐게 뭐 있느냐고. 패키지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패키지로 가던 ,인터넷에서 찾든지 큰 것을 찾는 거야 쉬운 일이다. 나는 그런 곳에서 보이지 않는 내밀한 이야기를 보고 싶은 것이다. 어려운 말로 하면 소관대찰(小管大察)이 아니라, 대관소찰(大觀小察)이 좋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선 일찌감치 선두주자로 지금도 산티아고 순례 길을 혼자 걷고 있을 k가 한 없이 부럽다. 그녀의 용기가 부럽다.
생각해 보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카톡을 주고받아도 성이 차지 않는다. 한 밤중이라도 달려가 만나보고야 마음이 놓인다. 그런 연인들처럼 나도 직접 만나고 싶은 것이다. 만나서 천천히 그들의 내밀한 속삭임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내가 감히 k처럼 혼자 배낭 짊어지고 훌쩍 떠나지 못하니 차선으로라도 패키지여행을 선택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세월이 발달해 라디오에서 들려주고, TV에서 보여주고, 마우스 몇 번이면 보이고 들리는 세상이지만 내 발로 걷고 내 코로 냄새 맡고 싶다.
사는 게 지루해 질 때 잠시 만의 일탈(逸脫)은 활력이다. 낮선 길에서 만나는 낯선 바람이 좋다. 그 낮선 바람 속에서 낯선 언어를 만나고 낯선 음식을 먹으며 낮선 사람들을 만나는 게 좋다. 그러다 문득, 내가 사는 아파트 앞산이 떠오르고, 내가 늘 아침마다 걷는 둘레길이 떠오르고 내 가족이 나도 모르게 떠 올려 질 때. 아무리 좋은 음식에, 좋은 호텔에 머물고 다닌다 해도 내 집만 할까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을 느겼을 때 짐을 싸고 돌아와 다시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알듯이 여행이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낮선 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끝내는 슬그머니 돌아오게 되는 한 순간의 일탈(逸脫)일 뿐이다. 그 일탈속에서 세상을 만나는게 아니라 나를 만나고 돌아오는 시간인 것이다. K처럼 용기가 없어 또 다시 패키지 여행으로 떠나지만 내게는 이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밤 마다 일탈(逸脫)을 꿈 꾸며 짐을 쌌다가 아침이면 주저앉아 짐을 푸는 일을 당분간은 하지 않게 될테니까.
거실 창밖을 살펴 본다. 하현달이 뜨기엔 아직 이른 걸까? 달은 아직 뜨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서울 밤하늘에 드문드문 보이던 별들도 오늘 밤엔 보이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내 마음 같다.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 그 베일을 벗기러 내일 아침엔 떠날 것이다. 한결 가벼워진 여행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설 생각에 오늘 밤 제대로 잠들긴 틀렸다. 그러면 어떠랴. 낮선 곳의 내밀한 곳을 보고 듣기 위해 떠나는 것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