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와 여행을 떠났어요. 여행지에서 호텔에 들어 친구가 먼저 샤워를 했어요. 나중에 내가 샤워를 하고 나오니 친구가 책을 읽고 있더라구요. 그 때 그 풍경이 참 생소해 보였지요. 책이라면 나도 그 친구 못지않게 좋아하는 터라 내 여고 시절의 반은 학교 도서관에 붙박이처럼 살았지요.
그 시절 집에서라고 예외는 아니었지요. 책 읽느라 걸핏하면 심부름도 제대로 못하는 내게 엄마는 ‘책이 밥 먹여 주냐?' 아님 '나중에 대통령 마누라라도 될테냐?' 라는 이상한 말로 나를 야단치기도 했어요. 엄마 말대로 대통령 마누라 됐으면 좀 좋으련만 그런 자리는 내 복이 아니었으니 엄마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지금도 책사랑은 여전 하지요.
신혼 시절에도 남편이 월간지 사오는 날엔 밤이니 자긴 자야하는데 누으면 잠이 오지 않았어요. 나중에 자라고 윽박지르는 남편 때문에 잠자리에 들긴 들었지만 잠이 올 리가 없지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머릿속은 점점 더 맑아오고 어둠 속에 월간지가 날아 다녔지요. 그러다 남편이 잠든 기미라도 보이면 살며시 일어나 부엌으로 갔지요. 방에서 불을 켜고 책을 볼 수는 없으니까요.
희미한 삼십 촉 백열등 아래서 코를 박고 월간지를 읽었어요. 겨울바람에 부엌문이 덜컹덜컹 거려 무섭기도 했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이 때는 그 소리도 무섭지 않았어요. 춥고 연탄 냄새 폴폴 나는 부엌 부뚜막에 앉아 책을 읽어도 한 없이 좋았었지요. 그런 내게 누군가 여행지에 책과 뜨개질 중에 무엇을 가져 가겠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책이 아니라 뜨개질을 선택 할 거예요.
요즘이야 사라져 가는 뜨개질이지만 우리 어렸을 적만 해도 겨울에는 이 집 저 집에서 엄마들이 뜨개질을 했지요. 아버지 스웨터가 낡으면 풀어서 아들 딸 것이 되고 다시 그 스웨터가 낡으면 풀어서 양말이나 벙어리장갑으로 태어났지요. 요즘이야 옷들이 지천이라 뜨개질은 세월 속으로 밀려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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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털실 가게들이 가끔 보이는 것을 보면 뜨개질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는 모양이지요.
한 달 내내 뜨개질을 했어요. 길 가다 문득 눈에 떠오르는 포근포근한 실이 보이자 무작정 사고 봤지요. 집에 와서 쳐 막혀 있던 대바늘을 꺼내 놓고 나니 무엇을 따야 할지 남감 했어요. 요즘 누가 뜨개질 한 옷을 입나요. 사 가지고 오긴 왔는데 이걸 어떡하지 하며 들여다보다가 하루를 넘기고서야 뜨개질을 시작했어요. 목도리를 뜨기 시작 했지요. 온 집안 식구들 나를 비롯해 손자, 며느리, 딸 등등 이 사람 저 사람 목도리가 색색깔로 떴지요.
가족들 반응도 다양 했어요. 딸은 그런 걸.... 하고 워낙 며느리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 터라 대 환영을 받았지요. 손자 녀석은 빨간색을 유난히 좋아해 떠 주었더니 장남감이 됐어요. 목에만 하는 게 아니라 머리에다 쓰고 다니고 허리에다 감고는 재밌다고 하하 거려요. 한 달 전에 보고 있었던 책은 펼쳐 진 채로 책상 위에서 낮잠을 자는데도 털실이 떨어져 더 이상 뜨개질을 못하는 나는 손이 근질거리고. 지금 망설이고 있어요. 다시 책을 볼 것인가 실을 더 사가지고 와 뜨개질을 할 것인가.
갑자기 무라야마 하루끼의 에세이 한 부분이 생각나네요. 하루키는 혼자 술 마시는걸 좋아한대요. 그래서 여자들이 귀찮게 하는 술집이 싫어서 "뜨개질 바"가 있었으면 좋겠대요. 하루끼는 혼자 술 마시고 여자들은 옆에서 조용히 뜨개질을 하는 거예요. 술 마시다 하루키가 묻는 거예요.
‘ 지금 무얼 뜨고 있지?..........’
‘으응...장갑..’
뜨개질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따뜻함과 평화로움이 저절로 느껴지지요. 자연히 누구를 위한 뜨개질일까도 궁금해지고요. 아마도 무라야마 하루끼도 이런 풍경이 그리웠던 모양 이예요.
누구나 그리워하는 풍경인데도 요즘은 그런 풍경이 보이지 않아 아쉬워요. 물론 세월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이라 그렇겠지요. 그런 세월이라서 어쩌면 내가 뜨개질을 하는지도 몰라요. 우리 아이들에게 손자에게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개질을 하는지도 몰라요. 우리 아이들에게 손자에게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할머니.....’하고 떠 올리면 뜨개질 하는 할머니를 자연스럽게 떠 올리면 좋겠어요. 우리 때 보다 더 빠르게 살다가 가끔 숨이 막힐 때, 지치고 힘들 때, 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정경 속에 잠시라도 들어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살아 갈 힘을 얻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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