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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재적을 부쳤습니다!

茶香 2020. 7. 27. 19:03

장마 전선이 아랫녁으로 갔다고 전하는 아침. 그래도 장마철은 장마철이라 하늘엔 잿빛 구름 가득 하나 부는 바람은 선선합니다 이게 장마철이 맞나 싶습니다. 초복이 지난지도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올해 같은 복중이라면 사는 것도 수월합니다. 징검다리 건너듯 그늘에서 그늘로 찾아드는 빠른 발걸음도 불러 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온 하늘에 펼쳐진 그늘 장막이 좋은 건 나뿐만이 아니지 싶습니다.

 

평소 같으면 축 쳐져 있을 숲 속의 미루나무도 손을 흔듭니다. 그 아래 조붓한 오솔길이 있습니다. 그 오솔길에는 내리는 비 탓에 늦은 산책길에 나선 사람들의 모습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산책길 초입에 노년의 커플이 다정하게 손잡고 산책길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입니다. 무심한 바람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모습에 행복했습니다. 머물지 않는 걸음과 마주치지 않은 시선이라 더 좋았습니다. 숲속의 수백수천의 잎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는 나뭇가지에 앉은 직바구리들이 도란도란 수다를 떠는 풍경도 좋았습니다.

 

웬 걸, 그 행복도 잠시, 선선한 바람 한 줄기 거실로 들어서더니 비가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장마는 장마다. 이런 게 장마라는 걸 깜박하고 있었습니다. 열어놓은 창들을 닫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바람이 남동풍이 아니라 북서풍이라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외출하려던 계획도 집에 있기로 수정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남아돌았습니다. 예정된 백수 생활로 달이 뜨고 해가 떴는데 할 일이야 찾으면 그만입니다. 두리번두리번 할 일을 찾다가 점심으로 감자전을 부치기로 했습니다.

 

아니지요. 감자전이 아니라 감재적을 부치기로 했습니다. 고향의 어느 작가분이 고향의 감자전은 감자전이 아니고 감재적이라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감재적은 감재적. 감자전은 감자전 엄연히 다릅니다. 맛도 식감도 다릅니다. 감자전과 감재적의 분류하는 기준은 감자전은 믹서로 갈아 부치는 것이고 감재적은 구멍이 숭숭 뚫린 강판에 갈아 부친 것입니다. 나도 감자전이나 감재적 구분은 확실히 압니다. 혀끝이 무뎌 음식 맛에 둔감해도 그쯤은 구별을 합니다. 감자전은 감재적에서 풍기는 고소함이나 쫄깃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양쪽 맛을 다 아는 나로서는 감자전은 그저 느끼할 뿐입니다.

 

싱크대 아래 칸 어두컴컴한 곳에 갇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강판을 꺼냈습니다. 베란다에서 굵은 감자 두 어 개를 가져다 돌돌돌 흐르는 물에 씻었습니다. 큰 숨을 한 번 내어 쉬고 강판에 갈았습니다. 습관적이고 익숙한 동작으로 위아래로 조심조심 강판에 감자를 갈았습니다. 잠시 한 눈을 팔면 여차 없이 손가락까지 갈려 피가 흐르고 의도치 않게 피 맛까지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눅진하게 붙어있던 적막강산에 감자 가는 소리가 입에서 침을 고이게 했습니다. 늘 곁에서 두런두런 도란도란 얘기를 해주고 있는 순돌이로 이름 붙여 준 TV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프라이팬을 가스불에 올리고 기름을 둘렀습니다. ‘치이~~ 익 칙칙’ 소리와 함께 기름의 고소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습니다. 감자를 강판에 갈아 쓸데없는 물기를 빼냈습니다. 간 감자를 프라이팬에 한 국자 떠 붓자 행복에 겨운 기름들이 춤을 추며 널을 뛰었습니다. 그 바람에 깊고 깊은 곳에 숨어있던 추억들이 놀라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평소에는 잊고 살다가 때가 되면 슬며시 고개를 들고 나오는 고향집 여름 저녁 풍경입니다. 식구들이 마당 한 가운데 놓인 평상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서산에 초승달 떠오르고 샛별 하나 떠오릅니다. 그 아래 엄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부쳐주는 감재적을 한 순간에 먹어 치우던 오 남매가 있었습니다. 소환된 추억은 새록새록 했습니다. 잘근잘근 씹었습니다. 그 씹는 맛이 그만 이었는데 내가 부친 감재적도 고소하고 쫄깃쫄깃하고 맛있었습니다.